섣달 그믐 / 권옥희
앞선 아비의 등 뒤론 바다보다 더 깊은 어둠이 흐르고
속 끓이는 불덩이처럼 나는 종내 그 어둠 속에
혼을 놓고 말았다.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고향을 묻으며
손길 한 번 다가가지 못한
유년의 골짝마다 그리움만 무수히 별로 뜨는데
어둠은 어김없이
내 등을 일으켜 뭉텅뭉텅 잘려나간 기억을
이어대다가 밤이슬로 부쉈다가
처음부터 내 혼은 없었던 것 같아 누구도 부르지 못한 섬.
낯익은 길을 열어도 하늘은 달마저 감춘 다 털어낸
벼포기의 밑동 같은 그믐밤을 내려놓았다.
섣달 어둠에 매달린 이리도 질긴 뿌리 어이 잘라낼거나.
아직도 바람같이 내달르고 있는 아득한 세월 너머
넉넉했던 아비의 등짝 이미 간 곳 없고 넉살 좋은
심장처럼 굳은 가래떡을 썰며
나는 떡국 한 그릇도 목이 메어 넘길 수가 없는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이 깜깜함 속에
가슴을 치고 있을지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몸을 일으키며 어둠보다
더 깊은 해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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