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섣달 그믐 / 권옥희

덕 산 2025. 1. 24. 06:37

 

 

 

 

 

섣달 그믐 / 권옥희 

 

앞선 아비의 등 뒤론 바다보다 더 깊은 어둠이 흐르고

속 끓이는 불덩이처럼 나는 종내 그 어둠 속에

혼을 놓고 말았다.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고향을 묻으며

손길 한 번 다가가지 못한

유년의 골짝마다 그리움만 무수히 별로 뜨는데

어둠은 어김없이

내 등을 일으켜 뭉텅뭉텅 잘려나간 기억을

이어대다가 밤이슬로 부쉈다가

처음부터 내 혼은 없었던 것 같아 누구도 부르지 못한 섬.

낯익은 길을 열어도 하늘은 달마저 감춘 다 털어낸

벼포기의 밑동 같은 그믐밤을 내려놓았다.

 

섣달 어둠에 매달린 이리도 질긴 뿌리 어이 잘라낼거나.

아직도 바람같이 내달르고 있는 아득한 세월 너머

넉넉했던 아비의 등짝 이미 간 곳 없고 넉살 좋은

심장처럼 굳은 가래떡을 썰며

나는 떡국 한 그릇도 목이 메어 넘길 수가 없는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이 깜깜함 속에

가슴을 치고 있을지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몸을 일으키며 어둠보다

더 깊은 해가 흘러간다.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날의 마음 / 주선옥  (0) 2025.01.26
복스러운 사람 / 이해인  (0) 2025.01.25
섣달그믐 즈음 / 박인걸  (0) 2025.01.23
구정 / 정민기  (0) 2025.01.22
추운 것들과 함께 / 이기철  (0) 2025.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