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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이승협

덕 산 2024. 6. 23. 09:38

 

 

 

 

 

장마 / 이승협

 

하루종일을 비가 내린다

하늘이 젖고 공기가 젖고 나무가 젖는다

우산이 젖고 술잔이 젖고

빨래를 널지 못하는 아내의 걱정이 젖는다

분홍 장미 연속무늬 벽지가 젖고

원목 책장이 젖는다

야, 우리들의 천국이야, 비닐장판 아래

음습한 벌레들의 번식은 이미 시작됐다

창 밖 저편의 세상이 흐려진다

발을 헛딛고, 풍덩,

우울의 흙탕물에 빠진다

발이 젖고 무릎이 젖고 가슴이 젖는다

목소리 따라 젖고

두개골이 마저 젖는다.

하루종일을 비가 내린다

무지무지한 갈증이 내린다

물 속에 갇혀서도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진다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줄 알았는데……

비는 점점 높은 곳으로 흐른다

물이 높아질수록

몸은 더욱 깊이 가라앉는다

이대로 둥둥 떠서 흘러갈 수만 있다면

어부의 그늘에 걸리지만 않고

하늘과 맞닿은 바다 끝까지 갈 수 있다면

하늘로도 올라갈 수 있겠는데……

퉁퉁 불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문득

아무 움직임 없이 편히 잠들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이틀 사흘 더 내린다

한 달 두 달 더 내린다

지금까지도 계속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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