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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다저녁 때의 냇둑 걷기 / 고재종

덕 산 2024. 6. 24. 08:59

 

 

 

 

 

여름 다저녁 때의 냇둑 걷기 / 고재종

 

이윽고 바람결 푸르게 일자

냇둑의 패랭이꽃 메꽃 부푼다

멀대 같은 쑥대며 개망촛대 흔들린다

진종일 백열의 혼몽 속에서 시달린

들과 마을과 산과 하늘이여

이윽고 바람결 푸르게 일자

냇둑의 미루나무 잎새 살랑거린다

억세게는 무성한 억새잎 스적인다

나 같은 건 마음 뿌리까지 설렌다

그때마다 내 넋을 수시로 들고 나는

저 흔하고 순수하고 질긴 것들이여

어느 순간 냇둑에 우뚝 서서

노을 부서져 반짝이는 냇물을 본다

냇물의 유유한 흐름을 본다

거기 늦게까지 물장구치는 아이들과

미루나무 끝에 걸리는 함성을 듣는다

나 같은 건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이여

이때쯤 황혼 속으로 새떼는 날아가고

때마침 뙈기밭에서 첫물 고추를 딴

여인은 냇물에 뜨건 발을 담근다

그 옆에서 옴쏙옴쏙 풀을 뜯던

흑염소들은 또 문득 목을 빼고 운다

그러면 어느 새 놀빛도 사라지고

온통 새하얘져버린 하늘 복판에

봉우리를 깊숙이 치받고 있는 서산,

그 우뚝함을 씻어내는 바람이여

그 우뚝함을 우러르는 여인이여

나 같은 건, 나 같은 건 시방

이렇게는 서럽고 높고 싱그러워서

주막집 들러 소주 한 잔 기울인다

벌써 앞들엔 달빛도 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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