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부수고 찢어발기지 않으면
곧 발광 할 듯이 속이 뒤집힐 때,
그래서 무언가를 기어이 박살내고 말 때라도
절망과 후회에 앞서 그때 본 벌거벗은 산과 들이
무의식적으로 우선 앞을 막아서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렇게 바닥까지 드러내고 있는데
그만한 일이 정말로 핏대를 올릴만한 거니....
그 헐벗은 산과 들은 제풀에 그런 반문을 내게 들이민다.
이 이상 더 어떻게 헐벗니.
네가 성내는 까닭이 너무 호사롭다.
높은데서 떨어져 피범벅 속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을 때,
목숨처럼 중하게 여기던 사랑이
환멸과 재와 찌꺼기만 남겨 놓았을 때,
속으로 유일하게 서로 공감하고 의지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자해를 감행하는 것을 보았을 때,
유류파동으로 집과 가게가 깡그리 날아갔을 때,
그리고 제살붙이 같던 사람들이
이승의 마지막 숨결을 몰아쉬고 고개를 꺾으면서
싸늘한 주검 속으로 떨어져갈 때도
필자를 진정시킨 것은 오직 그 것뿐이었다.
동서로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찢어진 사람들과 가족이 슬픔과 허무함으로 얼룩지고
병든 그리움을 용케 끝까지 감당하고 견뎌내는 힘도
실은 이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마음 저 밑바닥에 무언가 끈덕지고
단단한 것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피와 눈물로 넘쳐나는 그 한과 울분을
어떻게 감당해냈겠는가.
그리고 이런 끈덕진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은
또 도리 없이 모두가 흙이라는 것과 연관이 돼 있다.
그렇다. 마음속에 거칠 것 없이 벌거벗은 이런
한 뼘 흙조차 지니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남은커녕 제 발밑도 제대로 서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 이제하의 "한줌의 흙과 가난이 주는 위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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