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 공현혜
영월댁 할머니 마디 굵은 손엔 지문이 없다
호밋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같이 사는 할아버지 손에도 지문이 없다
삽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집에 사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 되려고 만난 것이기에 가족 있는 사람들은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 탓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할아버지는
높은음 목소리로 전국 사투리를 쓴다
담너머 들려오는 할아버지 화난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웃을 수 있는 것도
할머니가 막걸리 통 들고 빨리 걷는 것도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하루 일과였었다
은행이라고는 한 뼘 소금 항아리가 다였고
귀한 반찬은 낚시에 걸려던 생선뿐이던 생활
목소리 엮이고 목소리 엮으며 마음 엮어 살던 날은
할아버지 아들 찾아 오던 날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소금 항아리깨진 그날은
억수장맛비 쏟아지고
경찰차도 병원차도 안 왔다
밥상에 마주 누워 할아버지는 왼쪽으로
할머니는 오른쪽으로 지문 없는 손가락을 걸었을 뿐
흙 발자국 넘치는 방안에는 빗소리만 가득 들어앉았다
동네사람들은 무덤 하나에 두 사람을 뉘었다
눈물 마르는 사람 없었고 제자식 보고 웃는 사람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나흘 동안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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