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중년이 된 나를 초등학교 3학년까지 키워주신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내 기억에 등장하면서부터 무서운 분이셨다.
사소한
잘못에도 항상 큰 대가가 돌아 왔다. 칭찬을 받은 적은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야단을 맞거나, 아니면 그냥 보통으로 지나간다.
겨울철 시골 아이들에게 가장 큰 소일거리는 썰매타기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경우 본의 아니게 책을 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하루종일 사라졌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 편이 낫다.
물론
그 뒤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은 뒤따르지만,
그 양과 질이 집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앉은뱅이 썰매,
'시게또'...
영어로는 '스케이트'다.
가끔은 일본인들의 구강구조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나에게는 바로 그 '시게또'가
없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재미는
다른 아이들이 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뿐이다.
한번 태워달라고 부탁해보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매일 같이 개울가로 나선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썰매를 타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버스 운전수가 되어 있다.
일년에 한 두 번 타보기도 힘든 버스...
마을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때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린다.
될수록 많은 아이들이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버스 꽁무니에서 나오는 배기가스 냄새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다.
얼음 가에 다다라 썰매를 세울 때는 반드시 '도..도..도..' 라고 외친다.
'도..도..도..' 버스차장들의 용어이자 어원은 '스톱'이다.
'스톱' - '스도' - '도'의 과정으로 변천해 왔다.
변천의 이유는 간단하다. 차장들의 품위유지이다.
폼 나게 발음하다보니 생겨난 결과인 동시에
차장으로서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외침이다.
이것을 생략하고 썰매를 세우는 것은
버스 운전수로서의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규범과 관행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겨울의 짧은 오후가 훌쩍 지나고 저녁 해질 무렵이 되자
저 멀리 뒷산 쪽에서 나뭇짐을 한
짐 진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외할아버지인 듯하다.
한참이 지나 가까이 다가온 나뭇짐은 예상대로 외할아버지다.
얼음 가에 시려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호통부터 치신다.
'이 노무 짜슥!, 집에나 가지... 이 추운데서 뭐하고 있노!'
'곧 갈게요' 풀죽은 목소리다.
덩실덩실
들썩이는 지게짐의 뒷모습이 집 쪽으로 사라진다.
썰매놀이는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나 얼음이 부석부석해져
물기가 돌 때가 되어야
끝난다.
어둑어둑해진 논두렁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겹쳐 신은 양말이 축축하다.
손끝까지 소매를 내리고 더운 코를
훌쩍이며 대문을 들어선다.
타지에 살고 계시던 아버지가 와 계신다.
그리고, 상방 앞 아궁이 근처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계신다.
반가운 마음에 머리 숙여 인사하는 나를
'어디 갔다 인제 와?' 하고 무뚝뚝하게 맞으신다.
시골 사람들의
인사법이다.
내가 어디 갔다 왔는지 궁금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사근사근한 서울 사람들의 말로 번역하면
'그 동안 공부
잘 하고 잘 있었어?' 이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아버지가 만들고 계시던 것은 '시게또'다.
아...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머리 뒷줄기로 한 가닥 상쾌한 기운이 솟구쳐 오른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날을
통틀어 가장 큰 행운인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시게또를 만들고 계시는지 물어 보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외할아버지의
지시라고...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단다.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데, 내가 개울가에 울고 서 있더란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다른 애들에게 시게또 태워달라고 했다가
얻어맞았다고 하더란다.
그리고 제발 시게또 하나 만들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하더란다.
나는 운 적 없다... 눈물로 호소한 적 없다...
쓸데없이 추운데서 떨고 있다고 호통까지 치고
가신 외할아버지가
그런 거짓말을 하셨다니...
나뭇짐을 덜렁이며 집으로 돌아오시는 동안 구상한 거짓말이리라.
그리고 운
것은 내가 아니고, 외할아버지였으리라..
시게또 타는 재미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
그 뒤
세월이 지나 그 많은 호통과 야단 뒤에 감추어져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3대 독자로 내려오는 집안에서 외손자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태어난 나...
그 외손자를 외할아버지는
끔찍이도 아끼셨다 한다.
외할아버지는 그 넘치는 사랑을 무뚝뚝하고 변화 없는
표정에 용케도 감추어 오셨다.
그러다가
그 사랑을 참지 못하고 겉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 실수,
그것이 바로 '시게또의 거짓말'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불현듯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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