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노(rho***) 2018-06-26 10:55:07
전 세계 스포츠 이벤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월드컵 축구일 것이다. 상대방 골대에 누가 더 많은 공을
집어넣느냐 하는 기량의 경합에 불과한 게임을 흥행 사업으로 승화시킨 것이 프로 축구고, 이것을 인간의
싸움 구경 본능과 국가 간의 경쟁 심리를 교묘하게 자극하여 중독시킨 것이 월드컵이라고 본다.
동양 철학에서 자주 회자되는 음양의 조화, 즉 상반(相反)의 충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음과 양의 확실한
구분으로 마무리하는 스포츠가 축구다. 축구를 '충돌의 스포츠'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 게다.
그 충돌 과정을 FIFA와 매체가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볼거리를 개발하여 상품화한 것이 월드컵인지도 모른다.
전 세계 축구계를 시장으로 비유한다면 FIFA는 시장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는 다른 형태의 거대한 독점기업이며,
부정적으로 비유하면 봉이 김선달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
1986년 멕시코 대회 이전 한국 축구의 염원은 성적 불문하고 월드컵 참가 그 자체였다. 이 말속엔 전패해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묵시적 동의가 함의(含意)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가가 반복되면서 염원은
'1승'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16강은 언감생심이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겨보라'였다. 2002년 단 번에
1승의 염원을 뛰어넘어 아직 염원 단계가 아니었던 4강까지 올라갔다. 4강 진출은 패닉에 가까운 급변사태였고,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초 압축성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4강까지 올라갔으면 발전단계 이론상
다음 염원은 당연히 우승일 텐데, 그 후 우승하겠다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제일'을 세계에서 제일 좋아하는 국민성을 감안할 때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각종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감독의 목표나 꿈은 우승일 테고, 대개 '우승하겠다'라며 일단은 큰소리친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다른 것 같다. 우승하겠다고 말하는 감독은 소수의 특정 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16강'이
목표라며 겸손을 떤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감독도 예외가 아닐 뿐 아니라 아예 16강 이상은 언급조차 하지도 않는다.
16강 이상은 '복걸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16강에 오르기 위해 플랜 A가 어떻고플랜 B가 어떻고 무슨 99%가
완성되었느니 하는 말들보다 남들이 웃든 말든 우승이 목표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개(氣槪)가 더 효과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으더터지기 전까진 계획이 있다.'(Everyone has a plan til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라고
말했다는 타이슨이 떠오른다.
신태용이 애는 엄청 썼겠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운도 따라주지 않는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전 대회에서 축구 최강국이자 개최국 브라질을 7대2로 무참하게 짓이겨 버린, 승산을 언급하기조차 부담스러운 독일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을 초토화시키지 않으면 16강 진출을 낙관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다. 당초 독일이 멕시코와
스웨덴을 가볍게 이기고 마지막 한국전에선 느슨하게 시합에 임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수립된 '전략'을
부랴부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상정하지 않았던 불리까지 겹쳐 있다.
16강 진출이 이론상 가능하다는 초비현실적 몽상 같은 기대는 깨끗이 버리고, 우리가 가장 능숙한 '결사적인
투혼(최다 파울)을 발휘하는 위대한(?) 정신력'으로 독일을 잡는다면 16강 진출만으로 만족하는 평범한 16강
진출보다 훨씬 큰, 2002년 4강을 압도하는 우승에 걸맞은 엄청난 명성의 기록이 FIFA 축구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른다.
브라질도 독일한테 7대2로 졌는데 까짓것 10대0으로 진다고 무슨 대수냐 하는 각오로 덤빈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16강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실낱같이 남아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탁상 상의
비현실적인 가능성에 불과한 그야말로 으더터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여러 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독일은 1954년 첫 우승 이래 평균 20년 주기로 네 번 우승했다. 기록을 보면 우승한 다음 대회에서 '죽 쑤는 전통'이 있다.
74년 우승한 뒤 78년 대회에선 1승 3무 2패로 예선 리그에서 탈락했고, 90년 우승 뒤 94년 대회에서도 16강전에서 탈락했다.
이 전통(?)이 이번에도 이어진다면 한국에 패배하거나 16강전에서 탈락해야 한다. 한국을 경시할 게 분명한 독일의
오만(傲慢)과 독일 한번 깨보자는 한국의 오기(傲氣) 싸움으로 판이 짜진다면 승부는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상식 밖의 일을 심심찮게 저지르는 한국이 독일을 이긴다면 그 또한 상식 밖의 사건으로 기록될 건 분명하다.
공식 대회가 아닌 FIFA A매치였지만 한국이 독일을 3대1로 이긴 적이 있는데, 독일이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것은
그 시합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98년 미국 월드컵과 2002년 준결승전에서 똑같이 2대3으로 독일에 졌는데,
이번엔 한국이 3대2로 이길 것 같은 예감을 강제적으로 들게 하고 싶다. 아전인수로 끝날 개연성이 높긴 하지만...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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