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8-03-14 23:56:11
작금의 ‘미투’ 국면의 현장 속에서 여과 없이 오르내리는 뜨겁고 부끄러운 민낯들을 보면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짐승으로 달려 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고 확인하게 됩니다. 또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하지만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자기 양심을 일말이라도 일깨우는 이들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며 내 이름이 거론되거나 자막으로라도 올려가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기 보다는 분명히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사회’가 왜 이런 지경으로까지
견인되어지게 되어버린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곪아 터져버린 곳에 새 살을 돋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교육함에 있어 무엇이 가장 먼저이고 우선되는 것일까.. 두말할 것도 없고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고금을
통하여 세기 마다 증명되어진바 곧 ‘예의바른 인격체’입니다. 좋은 인품으로 아름답고 온유한 덕목을 갖춤으로 주변을
밝게 하고 즐겁게 하며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것을 옳다고 하고 좋다고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된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에 큰 것 한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예의라는 옷’을 갖추어 입을 기회들이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 대학원까지 사람의 모양을 갖추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은 많이 있지만
그러한 곳들 대부분에서 ‘예의 교육’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금방 생각나는 것으로 쉽게 살펴보아도 사회생활과 도덕과 윤리라는 과목이 있지만 국어 영어 수학이 온통 차지하고
있는 수업시간표 속에서 간신히 저 끝 쪽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연명을 하고 있는 형편으로 쯧, 마지못해 살려두고
있는 모양이며 그나마도 아예 죽여 버린(!) 시간표들의 뻔뻔한 대두의 시대의 작금의 도래도 이미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보면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들은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가지고는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지만 ‘도덕과 윤리 강의를 전문으로 인간필수의 예의를 가르치는’ 학원 같은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그러나 또한 그렇듯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는.. 과연 어느 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겠다고
돈을 들여가면서 애써 사실은 있지도 않은 예의학원을 열심히 찾아보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답의 동그라미는 금방 그려집니다.
그러나 예의와 범절 그래서 예의범절(儀凡節)은 가르쳐 주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예의는 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고 배워가는 것이라고들 많이들 말하고 또 분명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렇듯 ‘본을 보이려면’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예의의 본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의실종’의 모양들이 끝없이 이어지며 이렇듯 점점 더 심화되고 있으며 온갖 실망과 개탄 그리고
탄식으로서의 낯 뜨겁고 마음 부끄러운 일들이 우리 사회 속에 출렁이게 된 것입니다.
작금에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미투 Me Too’ 운동 역시도 그 근본은 예의의 실종 곧 무례(無禮)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추행 성폭행이라 함은 곧 상대방의 심경을 헤아리지도 않음은 물론 당사자의 의사를 아예 무시하고 그저 강압적
무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성적욕구를 만족시키는 모양으로서 곧 상대방에게 어떤 예의의 모양도 갖추지 아니하는
그저 원색의 폭거이자 폭행 곧 무례자(無禮者)의 행패입니다. 이것이 사회에 만연이 되었다면 곧 ‘예의실종’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며 그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예의를 중시하여 가르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지금 전개되는 모양들은 어쩌면, 아니 그래, 올 것이 오고 터질 것이 터졌다는 느낌을 크게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국면 속에서 누군가를 노려보거나 째려보면서 탄식하고 분노하며 손가락질을 할 것 없이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얼마나 ‘예의 바른 아이’가 되도록 관심을 갖고 또 아낌없는 투자를 하였는가를 돌아본다면 우리 사회의
작금의 현주소와 그 무례의 정착됨에 관한 이유와 근본을 알 수 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을 잘 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국영수 우선주의로 올인 하는 교육제도는 물론 많은 지식과 사회적 기능은 가질 수는 있게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예의범절의 모양을 갖추게 하여 품격 있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공부 잘 하는 아이’로 키우기에는 혼신을 다하였지만 ‘예의 바른 아이’로 자라나기를 원하는
것은 그저 그래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음이 다수였다는 것이 지금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미투’입니다.
과연 마음은 마음 일뿐 바라는 바가 눈앞의 현실과 현재로 실현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서는 수고와 땀과 투자가
필요합니다. 사과이든 배이든 심고 가꾸지 않으면 얻어질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예의 역시 수고와 땀과 돈을 들여
우리들 속에 심어 놓고 가꾸기를 거듭하지 아니하면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예의가 없는’ 곧 무례(無禮)의 모양들이
활개를 치게 되고 지금 저렇게 성추행과 성폭행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백주 대낮에서도 거리낌 없이 자행되어졌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 그늘이며 뒷골목의 모양들이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해박한
지식의 자리와 점잖은 권세의 자리들 같은 그럴 듯한 겉모양들 속에 감추어졌던 악마적 추악함의 모습들이 이렇듯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 것이고 휴 거기에 내 이름이 없다고 안도하거나 함부로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내 입술이 긴 호흡의 탄식으로 막혀지는 이유를 스스로 찾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를 이렇듯 ‘예의 없는 것들’의 난장 모양의 만들어져 오게 된 과정에서 나 역시 아닌 듯 공범으로서의
일편과 일환을 담당하였다는 양심의 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미국사람들입니까? 일본사람들입니까? 북한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이며 그 ‘우리들’ 속에 선명한
내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들과 우리 사회의 출세일변도의 모습들이 이러한 ‘예의실종의 사회’를 만들고 이렇듯
많은 무례자(無禮者)들의 양산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모두가 ‘홀랑 벗은’ 목욕탕 안에서는 지위고하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다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목욕탕이 아닙니다.
사람은 각각 자신에게 알맞고 또 주어진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으로 짐승과 구분되어지지요. 자기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는 존재는 사람 밖에 없습니다. 즉, 사람은 영육 간에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육신의 한 편을
담당하면서 완전 소멸의 때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이 설(舌)과 성(性)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도락의 자리로만 치닫기를 거듭하기 때문에 또한 가장 쉽게 자신을 망발로 가게 하는 두 주역입니다.
다행히도 둘 다 육(肉)에 속한 것으로서 그 주인은 영혼입니다. 즉 이성으로 지혜로 깨어있어 자각하는
영혼만이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는 것이지요.
미투.. 비참하고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나를 농락하고 능욕한 벌거벗은 육욕에 옷을 입히는 기회로 삼으십시다.
저 누군가가 아닌 지금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나 자신 내속의 천박함을 물리치고 새롭게 일어납시다. 내 아이들에게
예의를 물려주어 품격을 잃지 않는 인격자로 존경 받으며 살아가게 합시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 나의 ‘예의’를 재어봅시다.
이것을 더욱 키워 물려주고 이어줄 수 있는 고귀한 인격자들이 되십시다. 아무 것도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는,
그래서 한 없이 마음껏 자유로운 ‘사람들’이 다 되십시다.
산골어부 2018314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인의식 과 노예근성. (0) | 2018.03.20 |
|---|---|
| 열흘이 넘게 피는 월계화 (0) | 2018.03.19 |
| 진흙탕싸움을 멈추게 할 화해의 달인 (0) | 2018.03.14 |
| CNN 보도, 자유의 힘. (0) | 2018.03.09 |
| 진정한 승리 (0) | 2018.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