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복(yor***) 2017-11-27 08:22:01
역사란 무엇인가.
지난날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와 국가, 민족 등이 겪어온 과정이나 중요한 사실,
사건의 자취 또는 그에 대한 비판적 조사나 연구다.
또는 사물이 과거로부터 변천하고 발전해온 과정이나 자취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는 글자가 만들어 짐으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사(有史) 이전과 이래로 나뉘어진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록하는 시대적 기준은 어떤 것일까.
196070년대의 역사를 기록하려면 ‘그때의 정황’ 이 기준이 된다.
2017년이 기준이 되면 역사가 왜곡되는 게 그런 이유이며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사람이 잘못된다.
196070년대에는 먹다 남은 쌀밥을 버리면 악이고 죄였다.
쌀이 귀하고 비싼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쌀밥뿐 아니라 먹다 남은 고기까지도 서슴치 않고 버린다.
시대의정황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역사기록은 ‘그때의 정황’ 이 절대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제를 오늘의 기준으로 재단하면 안 되는 이유다.
나는 1957년 대학2학년을 마쳤을 때 징집영장을 받았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101보충대를 거쳐 최전방부대인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됐다.
2대대 3중대본부에 도착했을 때 더운 여름이라 사병들은 윗옷을 벗고 있었는데
그들이 차고 있는 탄띠에는 커다란 수통과 단검, 그리고 실탄그립과 수류탄이 장착돼 있었다.
그리고 2인용 참호에 들어갔을 때 눈높이에 팻말이 붙어있었다.
‘졸면 죽는다’. 최전방부대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1년이 지났을 때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종참모의 추천으로 연대 본부중대
본부의 일종계로 발령이 났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군대의 서류와 서식을 접했다.
그때 우리사회에서는 세로줄이 그어져있는 양면괘지에 잉크를 묻힌 펜으로 서류를
작성했으며 복사를 위해서는 얇은 괘지사이에 묵지를 끼우고 골필로 글씨를 썼다.
그런데 처음 보는 군대의 서식은 아주 달랐다.
갱지에 인쇄된 용지에는 수신, 제목, 참조와 그 아래에 서류의 내용이 기재되고
마지막으로 발신자와 유첨, 첨부가 있었다. 글씨는 모두 가로로 쓰여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미군이 사용하는 서식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나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미국문화를 접한 셈이다.
그때의 한국군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단련된 조직이었으며,
실제의 전투를 통해 비합리적인 부분들이 크게 도태된 선진화된 집단이었다.
미 군사고문단KMAG을 통해, 무기체계는 물론, 편성과 교육 훈련 등
그 운용이 가장 발전된 미군의 것을 받아들인 우수 집단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장교들이 미국유학을 통해
우리사회의 엘리트로 자리잡고 있었다.
세계2차 대전이후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들 중 40여개 국가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모두가 ‘군사정변’에 실패, 독재자가 지배하는 가난한 후진국이 됐다.
오직 한국만이 군사쿠데타가 성공,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됐다.
여기에는 박정희의 굳은 의지와 애국심, 국가를 개조하려는 목표와 함께 당시
우리사회에서 가장 우수한 집단인 군대의 역할이 절대적 이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GDP는 83달러였다.
지금의 한국은 구매력기준 GDP가 3만 달러다.
이 엄청난 차이를 설명하는 길은 단 하나, 박정희의 비젼과 지도력이다.
그 누구도 이점만은 부인하지 못하며 부인해서도 안 된다.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5.16이 일어났을 때,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경제이론은 아르헨티나의
경제학가 라울 프레비치의 ‘종속이론’ 이었다.
선진국과 후진국간 교역은 후진국이 불리해지기 때문에 후진국은
수입대체(내수)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처방이 그럴 듯했음으로 거의모든 후진국들이 종속이론에 따랐으며
국내에서도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모두가 실패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때 박정희는 종속이론에
따르지 않았으며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을 선택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비록 관 주도의 경제정책을 밀고 나갔지만 그 실행은
어디까지나 민간기업이 담당하도록 독려한 점이다.
여기에는 박정희와 이병철의 만남이 획기적인 전화점이 되었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존재임을 일깨우고 기업이 잘돼야 국가경제가 발전할 수 있음을 설득했다.
그 후 박정희는 친기업과 시장친화적인 지도자로 바뀌었다.
오늘날 경부고속도로는 거의 포화상태다.
그 물류의 양이 경제의 바로메타다.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려본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구상했고 독일에서 돈을 빌렸다.
국가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을 때 김대중은 이를 격렬히
반대했고 그 추종자들은 중장비 앞에 드러누웠다.
지금 한국은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가지고 있으며 차도를 위한
터널만도 2.189개다. 모두가 아는 대로 산업의 쌀은 쇠철이다.
포철이 없었다면 산업발전도 없었다.
온갖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포철을 세운 게 박정희다.
거기에는 박태준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대만이 중소기업위주의 경제정책으로 나갈 때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을 택했고, 여기에는 ‘방산’ 이라는 큰 구상이 깔려있었다.
오늘날 한국은 무기를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다.
대만은 가슴을 쳤고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1968년부터 77년까지의 10여년 동안 매 월 말에 열린 ‘수출진흥확대 회의’ 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했으며 수출 100억 달러가 달성될 때까지 박정희는
이 회의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 수출을 독려했다.
조선과 자동차산업에서 한국은 이미 세계일류다.
전자산업의 선진국인 일본도 한국의 TV와 스마트폰에는 밀리고 있다.
일본의 쉐라톤과 하이얏트 같은 일류호텔에 비치돼있는
일제TV의 화면은 우리 눈으로 볼 때 아주 거칠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유를 정제하는 기술도 우리는 세계일류다.
수출에서 정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은 게 그 때문이다.
대덕연구단지, KIST, KDI 는 세계가 그 우수성을 인정하는 연구기관이다.
박정희가 세운기관들이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자기나라에 수입하려고 했던 ‘국민건강보험’ 도 박정희의 작품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연료는 나무였다.
그래서 민둥산이 많았고 그 면적은 계속 커졌다.
세계에서 최단 시일 안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가
우리한국이며 이일을 이루어낸 지도자가 박정희다.
매년 봄이면 보릿고개였다. 절양 농가가 나타났고 나무껍질과
풀뿌리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했다.
이 배고픔, 길고긴 가난을 극복한 게 ‘통일벼’ 다.
박정희는 필리핀에 학자들을 보내어 벼의 품종을 우리 땅에
맞게 개량하게 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이 작업을 지원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개발한 품종을 수원에서 재배,
성공한 게 통일벼다. 단보 당 수확량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비로소 온 국민이 배불리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비로소 박정희는 ‘식량자급달성’ 이라는 휘호를 쓸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보통사람들에게 자조, 자립의 정신을 가지게 한 것이 그 핵심이다.
잠자는 민족의 혼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의 지도력이다.
지금도 농촌에 가서 박정희를 비난하면 농부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지금 60여 개국에서 새마을운동으로 자조, 자립을 꾀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공은 처음으로 이 땅에 탄탄한 중산층을 탄생시켰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다.
박정희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떠난 지 오래됐지만 개인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시해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가죽혁대가 너무 낡은 것이어서 대통령인줄 몰랐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넘어지게 했는가. 그게 ‘권력’ 이다.
물러날 때를 놓친 것이다. 호랑이등에 올라탔기에 내려올 수가 없었다.
오늘날 그의 평가는 지지와 반대로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큰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민족의 가난을 끊은 게 박정희다. 그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부인되지도 않는다.
나는 압축성장의 한 가운데서 월차, 연차, 휴가도 없이 청춘을
불사른 사람이며 이 모든 일에 대해 살아있는 증인의 한사람이다.
금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해 5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우표발행을 결정한바 있다.
그러나 지난7월 문재인정권의 압력으로 이 사업이 취소됐다.
정말 졸열하고 치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릇크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옹졸한 인간들이다.
정부는 기념우표발행을 취소했지만 대학생 단체인 한국대학생포럼은 9월4일
정부를 대신해 이 기념우표를 발행키로 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25일 만에 마감한 모금에는 후원자 6000여명이 목표치의 두 배인 2억원을 보내왔다.
학생들은 우정사업본부의 ‘나만의 우표’ 서비스를 이용, 3만 세트의 우표를 발행했고,
2만 세트는 후원자들에게 보내고 1만 세트는 일반인에게 판매하기로 했다.
나도 한 세트를 구매 신청했다.
이 우표세트는 삼일만에 3000여명이 신청, 완판 됐으며
대학생 포럼은 추가로 더 제작, 판매하기로 했다.
박성은(22) 한국대학생포럼 회장은,
‘대통령 기념사업은 정치적 견해차를 넘어서야 한다는 마음에
박정희 탄생우표 발행사업을 추진했다‘ 고 말했다.
이 일이 어떤 보수단체가 아닌 젊은 학생들에 의해 추진된 점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지 않은 뒷모습은 없다. 서양격언.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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