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한 교수가
방송에 출연할 일이 생겨서 방송국에 갔다.
낯선 분위기에 눌려 두리번거리며
수위 아저씨에게 다가갔더니 말도 꺼내기 전에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더라는 것.
퇴직해서 소속이 없어진 그 분은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는데,
다른 한 교수도 방송국에서
똑같은 경우를 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성격이 대찬 그 분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여보시오.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보시오.
나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고 해서 왔소.”
마침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제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가 모셨다.
그 제자는
“역시 우리 교수님 말씀은 다 철학이에요.
우리의 인생에서도 어디서 왔냐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
라고 말했다.
지난달 경기 파주시에 있는 ‘반구정’에 가게 되었다.
황희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3년 동안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유적지다.
그곳 기념관에는 황 정승의 유명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김종서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 장군은 일찍부터 용맹을 떨친
호랑이 같은 장수여서 아무래도
좀 겸손함이 부족했는지 중신회의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데
황 정승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일렀다.
“장군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의자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빨리 가서 반듯하게 고쳐 오너라.”
장군이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가끔 장군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자
한 중신이 유독 장군에게
더 엄격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장군은 앞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아서
하실 분이기 때문이오.
혹시라도 장군의 훌륭한 능력을
작은 결점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되어서 그러오.”
황 정승은 이미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늙어 물러갈 것이고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내다본 것.
마치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갈 것인가는 모르고
어디서 온 것만 내세우면 미래가 없다.
우리도 때때로 자문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 윤세영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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