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사유 / 이기철
저 내림이 죽음이 아니라는 걸까
길어 올린 주황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잎새들은 햇빛으로 몸을 씻는다
바람이 들판에 새 길을 내고
뿌리들이 땅 속에서 다친 발을 만질 때
흙들도 이제는 쉬어야 한다
하늘이 그 큰 원고지의 빈칸마다 파란 시를 쓸 때
단맛으로 방을 채운 열매들이
무거워진 몸을 끌고 땅으로 돌아온다
내년을 흔들며 떨어지는 잎새들
몇 천 번 화염에 데인 단풍의 불에도
산은 제 뼈를 꼿꼿이 세우고
사원은 고요함으로 그늘을 밝힌다
불타는 것을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통의 빛깔인 저 환함
이제 영원의 모습은 추상이 아니다
나무들은 젖은 몸을 말리느라 등성이로 올라가고
짐승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익는 것이 전부인 시월
시월은 시월의 생각만으로 골똘하다
나뭇잎은 생을 펄펄 날리고
사람들은 가슴마다 생을 주워담는다
저 잎새들을 슬픔이라 말해선 안 된다
아무도 저 낙하를 죽음이라 말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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