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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호수를 때릴 때 / 이기홍

덕 산 2024. 7. 24. 08:42

 

 

 

 

 

비가 호수를 때릴 때 / 이기홍

문득 보았다
고요하던 호수가 징처럼 흐느끼는 것을
비 맞으며 호수는
비애를 가득히 밀어내고 있었다
비 그치자
징은 사라지고 호수는 넓고 깊어졌다
평평한 수면 속 푸른 핏줄이 비친다
비바람에 쓰러졌던 풀잎들도 호수가 일으킨다

어머니에게서 징들이 사라진 건,
이웃집 빨랫감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국수 반죽을 밀다 그런 줄 알았다
젊어서 네 아버지를 여의고부터
가슴속에서 종종 징이 울리더라
그래서 그 징을 저 호수에 버렸단다
우기 동안 어머니가 징소리를 견딜 때까지
아, 나는 왜 아무것도 듣지 못했나
풀잎들이 다시 바람에 씻긴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 때
젖어들며 나는
가만히 엿듣는다
호수 가득한 당신의 징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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