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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헤아리다 / 한혜영

덕 산 2024. 7. 22. 10:07

 

 

 

 

비를 헤아리다 / 한혜영

쉴 새 없이 유리창을 할퀴는 저 섬뜩한
손톱! 언뜻언뜻 칼날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여간 오랫동안 벼른 원한이 아니군요

우리가 어디에서 만난 겁니까
솔직히
시간을 더듬어도 잘 모르겠어서 소환하던 기억을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대에게 빌린 문장을 돌려주지 않고 도망쳐 왔을
아니면 당신의 야망이라도 가로채 야반도주를 했을까요? 

그도 아니면 당신에게 목숨 빚이라도 졌는지도

비가 상처를 세우면 내 마음에는 손톱자국이 깊어집니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비의 폭력으로 규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습관은 질기고 나는 나를 책임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비하고 나하고
조상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군
어떤 인과성이 없고서야 목소리가 저렇게 닮을 수는 없다는, 

남의 탓을 하는 원성까지도 똑같다는

단지
창문 아래 수북한 비의 손톱에서는 그 뿌리의 내력을 읽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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