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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김향숙

덕 산 2024. 6. 29. 08:40

 

 

 

 

 

장마 / 김향숙 

 

국숫집 마당에 젖은 국수가락이

하얀 기저귀처럼 흔들린다

 

햇볕이 나면 보송보송 말려

시장 골목 구멍가게로 배달한다

국수 값 몇 푼으로 유지하는 가족의 생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국수가락이 젖는 날에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장대비가 내렸다

한숨으로 허기를 달래고

마르지 않는 궁핍으로 앞치마를 동여맸다

 

장마가 지면 근심도 길어져

밀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국수를 뽑던 가장의 빈자리에

고단했던 시간들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국수가 길어지던 날 빗물에 풀려 버린 끈

주인 없는 앞치마가

빈 벽에 걸려 비바람에 날리고 있다

 

하늘에서 가늘고 긴 소면이 내리는 날

물의 가락을 뒷산이 후루룩 말아먹는다

장마 때마다 국수를 드시는 아버지

산소 앞에 식구들을 불러놓고

잔치국수를 대접한다

 

국수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이

널린 국수 가락 사이를 비집고

숨바꼭질하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국물 위로 떠오르는 밤

 

눅눅한 국수가락이 기억 속에 출렁이고

퉁퉁 불은 빗소리가 뒤척이는 밤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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