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시물을 무서워하라 / 법정스님

덕 산 2023. 10. 17. 13:07

 

 

 

 

 

시물을 무서워하라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받아쓰지 말라.

갈고 뿌리는 일에서 먹고 입기까지

사람과 소의 수고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벌레들이 죽고 상한 것도 그 수가 한량이 없을 것이다.

내 몸을 위해 남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남의 목숨을 죽여가면서 나만 살려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도 늘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따르고,

길쌈하는 아낙네들도 몸 가릴 옷이 모자라는데,

나는 항상 두 손을 놀려두면서 어찌 춥고 배고픔을 싫어하는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실 빚만 더 하는 것이지 도에는 손해가 된다.

해진 옷과 나물밥은 은혜를 줄이고 음덕을 쌓는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락과 풀 옷으로 그 몸을 가리라.

산야에 깃드는 새와 구름으로 벗을 삼고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 야운 비구(野雲 比丘)의 자경문(自警文) -

 

 

 

 

 

 

 

한때 우리나라에도

‘소비가 미덕’이 라는 말이 바람을 탄 적이 있었다.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소리가

어릿어릿 한 소비자를 현혹시킨 적도 있었다.

이런 말들은 소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업주와 상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광고 문구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소비가 많을수록

기업의 이익이 많기 때문에

소비 의욕을 부채질하는 그런 달콤한 말이 나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 사정이 몹시 어려워진 요즘에는

그런 말도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검소와 절약이 미덕으로 통하고 있다.

검소와 절약은 그 어떤 시대일지라도 영원한 미덕이다.

요즘의 우리들은 굶주리거나 헐벗었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만큼 먹고 입는 걱정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와

옛날에 견주면 생활이 너무 편리해졌다.

 

그러나 한번 돌이켜볼 일이다.

겉으로는 생활에 별 불편 없이 잘살게 되었고 편리해진 것만큼,

인간으로서 그 삶의 질도 향상되었는가를.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경향으로 볼 때 유감스럽게도 ‘사람값’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절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요즘의 절은 큰 절 작은 절 할 것 없이

물건이 너무 흔해 귀한 줄을 모른다.

시주물(施主物)에 대한 관념도 지극히 희미해져 간다.

신도들이 큰마음 먹고 뭘 갖다 주어도

고마워할 줄을 모를 만큼 시은(施恩)에 대한 감각이

너무 무디어진 것도 또한 보편적인 병폐다.

 

내 자신이 자주 목격한 바이고,

절 살림을 맡아서 꾸려가는 소임자들에게서 여러 번 들은 바이지만.

오늘의 승가는 스스로 복 감할 짓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말짱한 물건들을 볼 때,

이래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수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거가 끝나고 대중이 뿔뿔이 흩어진 후,

지대방이나 사물함에는 속옷과 겉옷,

혹은 양말짝이며 신발이 볼품 사납게 버려져 있다.

한두 번 걸치고는 빨기도 챙기기도 귀찮다고 해서

그대로 버린 것들이다.

다른 절에 가면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그대로 버리고 간 것이다.

 

 

 

 

 

 

 

자기 몸 둘레의 일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주제에

공문(空門) 에서 도를 찾겠다니 그야말로 웃기는 이야기다.

수도 정신이란 투철한 자기 질서를 바탕으로

불조(佛祖)의 뜻을 이으려는 것인데,

불조의 가르침은 그만두고라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식과

질서마저 가누지 못한다면

뭘 가리켜 출가라 하고 수행자라 할 것인가.

 

절에서들 흔히 하는 이야기로

대중공양이 안 들어온다고 푸념들을 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시주 보기를 원수처럼 보라고 한

옛 스님들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주 보기를 원수처럼 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세상에 공것은 없다.

거저 되는 일도 절대로 없다.

누구에게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신세(빚)를 지면,

반드시 언젠가는 어떤 방법으로든 갚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우주 질서요,

인간관계 아닌가.

 

시주의 은혜를 입는 것은 옛사람의 비유에 따르면,

내 숫돌에 상대방의 칼을 가는 것과 같다는 것.

상대방의 칼은 간만큼 잘 들겠지만,

내 숫돌은 그만큼 닳아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위에 든 <자경문>에서도

‘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빚만 더하고 도에는 방해가 된다.’고 한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

결제 중에는 산문 밖에서

중이 맞아 죽어도 어디 가서 호소할 데가 없었다.

결제란 선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생존 부터 출가한 불제자는 누구나 똑같이

엄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퍼런 질서다.

그러니 결제 기간에 돌아다니는 중은 수행자가 아닌

무위도식배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맞아 죽어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순진한 신도들한테 옷 사달라,

약 지어달라,

밥 내놓아라 하는 사이비 승을 종단에서는

‘유랑 잡승’으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유랑 잡승들이 횡행 하는 데는

물론 신도나 절 에도 책임이 있다.

결제 중에 찾아오는 출가승은 마땅히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고,

친불친을 물을 것 없이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안거와 결제에 대한

승단의 전통적인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

‘기한(饑寒)에 발도심(發道心)’이란 옛말이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해야

수도에 대한 간절한 생각이 우러난다는 뜻이다.

옳은 말이다.

수행자가 맑은 가난(淸貧)을 지니지 못하면 눈이 맑게 열릴 수 없다.

물질의 풍족은 우리들의 혼을 흐리게 하고 정신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예전 수행자들은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가난을 미덕으로 여겼던 것이다.

 

9세기 의존(義存) 선사가

설봉산(雪峰山)에서 수도원을 개설하고 있을 때

절이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거를 때가 더러 있었고,

다른 데서라면 가리고 나서 버릴 쓰레기까지도

삶아 먹으면서 겨우 연명, 수도에 전념했다고 한다.

이런 형편인데도 항상 1천5백 명이나 되는 많은 수행자들이

도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수행자들은 그런 가난 속에서

착실한 정진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옛 부처님(古佛)으로 불리는 조주(趙州)선사는

좌선할 때 앉는 선상의 다리가

부러져 타다 남은 장작 도막을 끈으로 묶어서 썼다.

이를 본 제자들이 새것을 만들어 드리려고 했지만

선사는 단호히 물리쳤다.

이런 정신이 바로 시들지 않은 수도 정신이고

시은을 끔찍하게 여긴 수행자들의 삶의 태도였다.

이런 수행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허구한 역사의 거센 격랑에도

침몰하지 않고 불법을 오늘까지 존속시켜왔던 것이다.

 

노동부 통계에 의하면,

10인 이상 고용 제조업체의 근로자 가운데 13.5퍼센트인

30여 만 명이 10만 원도 못되는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60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우리 주위에서

인간다운 생활과 가족의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이런 실정인데도,

세상 물정도 모르고 오늘의 절은 너무 풍부하게

물질을 수용하고 있지 않은 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분수 밖의 시은으로 자신의 숫돌이 얼마나 닳아가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 한다.

 

시물을 무서워하라.

 

- 법정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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