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은 없었다.
박천복 2022-11-07 08:06:09
구약성경 39권중 처음의 다섯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토라, 즉 ‘모세5경’ 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다.
그중 출애굽기는,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의 핵심내용이 담긴책으로 더 소중히 여기기도 한다.
이글은,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의 역사교수인
Shlomo Sand 의 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과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Chirstopher Hitcher의 God is not Great.
그리고 텔아비브대학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저명한 고고학자인
Israel Finklestein 과 Neil Asher Silberman 의
The Bible Unearthed 중 출애굽기 부분을 발췌,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실제로 ‘출애굽은 없었다’ 는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출애굽기의 물리적 근거가 크게 빈약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출애굽을 세부적으로 검토하는것에 대해서는 완강한 거부심리가 있었다.
유대문화에서 ‘유월절’ 축제가 맡은 역할은 말할것도없고 유대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출애굽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때문 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원전 13세기말부터 가나안에서 뚜렸한 하나의 집단민족으로 서서히 성장했다.
그 시대직전에 수백만명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인식가능한 과학적증거는 없다.
한편 당시 이집트는 그 국경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나일강 유역뿐 아니라 자기들이 지배하는 가나안에도 군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그들의 초소에는 주거, 무기, 식량, 물을 비축하는
구획된 구조였음을 고고학 발굴로 알게됐다.
약 20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집단이 여러 국경요새를 지났다면 반드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기원전13세기에 기록된 수많은 이집트문서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도 발견되지 않는다.
여러신전 벽의 기념문장이나 무덤속의 명문, 혹은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즉 이집트 기록에는 적국, 우방, 노예민족등 그 어느것 으로도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은 사실일수가 없다.
또 하나는 지리적인 문제로서,
지정학적으로 시대가 전혀 맞지않는 기록들이 출애굽기 안에있다.
히브리 노예들이 건설했다는 도시 비돔은 기원전 1200년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말에 건설된 것이며,
출애굽기에 나오는 에시온 게벨도 그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도시인 여리고도 13세기 말에는 성벽은커녕 별의미도 없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출애굽기에 일관되게 언급된 여러가지 지정학적 기록들은
사실은 6세기가 지난 기원전 7세기의 기준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출애굽기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것임을 뒷받침하는 뚜렷한 사례들이다.
출애굽기 기사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장정(전사)만도 60만명이었다고 한다.
한가족을 3명씩만 계산해도 180만명이며, 4사람씩 계산하면 240만명이 된다.
적게잡아 200만명이라는 대규모인구가 40년간을 시나이반도를 유랑했다면 반드시
그들이 거기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어야한다.
지금의 고고학은 첨단과학기술과 접목, 그 정교성과 구체성은 예전의 고고학과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다.
세계유수의 발굴단은 물론, 유명한 이스라엘 고고학전문가들 까지
글자그대로 모래를 채로 치듯 시나이반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의 야영지, 주거, 집터, 불을사용한 흔적, 토기의 파편과 무기,
그리고 유골등 그어떤것도, 단 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200만의 이스라엘은 거기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은 출애굽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 출애굽은 없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는 누가 언제 무슨이유로 창작했을까.
출애굽기의 창작과정과 그 동기는
기원전7세기 유대민족의 부흥을위해 족장전설에 관한기록, 단편적인
족보관련전설과 치밀하게 구성된 이집트와의 투쟁이야기를 종합,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기적적인관계를 조명함으로서 집필당시의 시급한
정치, 군사적 목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결국 기원전7세기, 강대한 파라오와 맞서야 하는 유대의 젊은지도자
요시야왕은 출처가 서로다른 여러 가지 전설을 하나의 포괄적인
서사시로 집대성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뒷받침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결합하여 탄생한 민족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출애굽의 유월절은 단 한차례의 행사가 아니다.
계속 위협을 가하는 외세에 맞서 싸우는 유대의 민족적 저항의 계속적인
체험이 유월절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에 따르면 이 모든 성스러운
텍스트들은 상상력이 뛰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쓴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선조가 사회규범과 정치구조를 정당화 하려고
발명한 이야기일 뿐이다.ㅡ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역사교수)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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