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집 / 백무산
이제는 낯익은 사람조차 드문 고향
가는 날이 장날이라 장거리 천막 국숫집에서
옛 아버지들처럼 한숨이나 쉬고 앉았는데
맞은편 국밥집 키가 큰 여자
마음 씀씀이 거침없고 몸놀림이 어찌 저리
넉넉하고 천연덕스런 보살인가
쇠전 앞길 새로 난 신작로
강을 건너야 닿는 중학교 등굣길
그 길 다시 넓히느라 판자 담장이 헐린 집
안방 아궁이가 큰길에 나앉은 집
군용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에 언제나 뽀얗던 그 집
담이 있던 자리 넝쿨장미가 길에 밟히던 그 집
길에 나온 그 아궁이에서 아침밥 차리고
동생들 도시락도 담고 개숫물 홱 길에 뿌리다
학교 가던 내 교복 바지를 적시던 그 아이
초등학교를 같은 반에 다녔지만 두어 살 많았던 그 아이
겨울엔 붉은 내복 바지에 여름치마를 입고 오던 그 아이
난 일찍이 세상이 싫어 강둑 풀밭에
머리 처박고 뒹구는 일 많았는데
그럴 때면 그 아이 방천둑 아래 비탈밭
땡볕에 벗은 발등 다 태우도록
수건 쓰고 주전자 물로 배를 채우며 종일토록
콩밭 매던 그 아이, 두 학기도 마치기 전에
대구 어디 방직공장에 갔다던 그 아이
비가 내려 넝쿨장미 붉은 꽃 흙범벅이 되어도
바가지 물 떠다 꽃잎 씻던 그 아이 없는 그 집
아,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나의 분노는 다시 많은 상처를 만들었구나
뒤집어 지배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
아직은 짓밟히고 내동댕이친 곳에 있네
더 온전하게 더 푸르게 피어오르는
넉넉한 저항이여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 백무산 시집 “初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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