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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집 / 백무산

덕 산 2025. 5. 19. 06:14

 

 

 

 

 

그 아이 집 / 백무산

이제는 낯익은 사람조차 드문 고향

가는 날이 장날이라 장거리 천막 국숫집에서

옛 아버지들처럼 한숨이나 쉬고 앉았는데

맞은편 국밥집 키가 큰 여자

마음 씀씀이 거침없고 몸놀림이 어찌 저리

넉넉하고 천연덕스런 보살인가

 

쇠전 앞길 새로 난 신작로

강을 건너야 닿는 중학교 등굣길

그 길 다시 넓히느라 판자 담장이 헐린 집

안방 아궁이가 큰길에 나앉은 집

군용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에 언제나 뽀얗던 그 집

담이 있던 자리 넝쿨장미가 길에 밟히던 그 집

길에 나온 그 아궁이에서 아침밥 차리고

동생들 도시락도 담고 개숫물 홱 길에 뿌리다

학교 가던 내 교복 바지를 적시던 그 아이

초등학교를 같은 반에 다녔지만 두어 살 많았던 그 아이

겨울엔 붉은 내복 바지에 여름치마를 입고 오던 그 아이

 

난 일찍이 세상이 싫어 강둑 풀밭에

머리 처박고 뒹구는 일 많았는데

그럴 때면 그 아이 방천둑 아래 비탈밭

땡볕에 벗은 발등 다 태우도록

수건 쓰고 주전자 물로 배를 채우며 종일토록

콩밭 매던 그 아이, 두 학기도 마치기 전에

대구 어디 방직공장에 갔다던 그 아이

비가 내려 넝쿨장미 붉은 꽃 흙범벅이 되어도

바가지 물 떠다 꽃잎 씻던 그 아이 없는 그 집

 

아,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나의 분노는 다시 많은 상처를 만들었구나

뒤집어 지배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

아직은 짓밟히고 내동댕이친 곳에 있네

더 온전하게 더 푸르게 피어오르는

넉넉한 저항이여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 백무산 시집 “初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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