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산중에 내리는 눈 / 법정스님

덕 산 2024. 2. 22. 09:32

 

 

 

 

 

산중에 내리는 눈 

 

올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다.

싸락눈 보다는 함박눈이 많이 내린다.

 

엊그제 처음 들은 말인데

눈고장에서는 눈을 건설(乾雪) 과 습설(濕雪)로 나누는 모양이다.

싸락눈이나 가루눈을 건설, 즉 마른 눈이라고 하고

함박눈처럼 물기가 많은 눈을 습설이아고 부른다.

건설은 많이 쌓여도 발목이 푹푹 빠지지 않는데,

습설은 밟으면 수렁처럼 빠져든다.

 

올겨울 이 고장에 내리는 눈이 주로 습설이다.

그래서 다니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눈삽으로 대강 걷어내고 발로 다져야 한다.

1미터 가까이 쌓인 눈을 헤치고 다니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들짐승들도 얼씬하지 않는 것 보니

그들도 내 생각과 같은 모양이다.

처마 밑에 먹이를 놓아두어도 며칠째 그대로다.

 

추위도 대단하다.

얼음장을 깨고 나면 이내 얼어붙는다.

영하 23.⁴도.

나도 이 산중의 들짐승처럼

최소한의 행동반경 안에서 움직인다.

 

한겨울 살림이 너무 뻑뻑하고 건조한 것 같아

모처럼 빈 벽에 글씨를 한 폭 걸었다.

액자나 족자로 된 글씨가 아니라

종이에 복사된 글씨를 압핀으로 꽂아 놓은 것이다.

빈 벽에 글씨를 붙여 놓으니

방 안이 한결 고풍스럽고 품격이 있어 보인다.

 

그 전에는 이런 일을 철이 바뀔 때마다 거르지 않고 이어 왔는데,

이 오두막에 들어와 살면서부터는

빈 벽에서 오히려 어떤 충만감을 찾으려고 했다.

 

벽에 붙인 글씨는

언젠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을 다녀오면서

아랫마을 기념품 가게에서 구해온 다산의 글씨다.

다산 선생의 글씨를 보면

그분의 인품과 그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글씨 또한 그 사람을 드러낸다.

 

18년간의 유배에서 풀려 고향인 마재[馬峴]로 돌아와 지내는데,

옛 제자이자 다산 초당의 주인인 윤규로의 셋째와 넷째 아들이

한강 상류에 있는 선생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념으로 써준 글씨가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이다.

사경첩(四景帖)에 실린 글씨 중에서도

가장 활달하고 먹이 듬직한 글씨다.

 

 

 

 

 

 

 

한문으로 된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안부의 인사가 끝나자 물었다.

“금년에 동암(東庵 : 다산 선생이 저술하며 살던 집)의 지붕을 이었느냐?”

“예, 이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혹 시들지 않았느냐?”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쌓아 놓은 돌들이 무너지지는 않았느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못 속의 인어 두 마리도 많이 컸겠구나.”

“예, 두 자쯤 자랐습니다.”

“백련사로 가는 길가에 심은 동백은 모두 무성하게 자라더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올 때 첫물차를 따서 말려 놓았느냐?”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

“다신계(茶信契)의 돈과 곡식이 혹시 결손이나 나지 않았느냐?”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와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다시 그곳 다산에 갈 수 없음도

또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혹시 다시 간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빚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미년(1823) 초여름 열상노인(冽上老人)이

기숙(旗叔)과 금계(琴季) 두 사람에게 써주노라.”

 

1818년 유배에서 풀린 다섯 해 만에 찾아온 옛날의 제자를 앉혀 놓고

자신이 떠나온 초당 주변의 궁금했던 일들을

낱낱이 묻는 선생의 감회는 실로 그지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아 살던 주거공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그 집과 둘레가 예전이나 다름없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 고맙게 여기고

그렇지 못해 방치된 채 황폐해 갔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 18년 중 10여 년을 그곳에 살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긴 인연의 터이므로

그 관심과 애착은 남다를 것이다.

 

다행이 다산초당은 다른 유배지의 소멸된 흔적과는 달리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잘 보존되어 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다.

참고 견디기 어려웠을 그 인고의 세월에,

선생의 강인한 의지와 정신세계가

후인들에게 삶의 지혜와 깨우침을 주고 있다.

 

나는 이따금 뒷짐을 지고

두런두런 ‘다산제생문답’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곳 앞바다 구강포(九江浦)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천일각(天一閣)에는

지금쯤 겨울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인기척을 듣고 문을 여니

30리 밖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이 올라와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눈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올라온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찻길에서 30분이면 올라올 수 있는 길을

눈이 너무 깊어 3시간 남짓 걸렸다고 한다.

그는 내가 오르내리는 눈길에

넘어지거나 빠지지 않도록

발자국으로 길을 다지면서 올라온 것이다.

그는 이 산중에서 고마운 유일한 친구다.

배낭에 감자와 옥수수를 넣어 메고 왔다.

 

그리고 전날 밤 뉴스에서 들었다면서

정채봉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빙판길을 달려 한동안 발걸음이 잦았던 중앙병원으로 갔다.

영안실에 들어서자

사람은 어디 가고 사진만 영단에 올려져 있었다.

어이없었다.

허무했다.

 

- 법정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