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장석남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숲이 비었으니 이제 머지않아 빈 자리로 첫눈이 내릴 것입니다 눈이 대지를 다 덮은, 코끝이 시린 아침 나는 세상에 다시 나듯 문을 열고 나서고 싶습니다 가시넝쿨 위로 햇빛은 무덤처럼 내려쌓일 것입니다 신(神)은 그 맨몸을 흐르던 냇가의 살얼음으로도 보이시고 바위틈의 침침한 어둠으로도 보이시며 첫눈의 해석을 독려할 것입니다
살던 집의 그림자도 점점점 길어집니다 첫딸을 낳은 아침처럼 잃었던 경탄을 되찾고 숲으로 이어진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득한 숲길이 되려 합니다 햇빛 아래의 가여운 첫눈이 되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휘파람이 되려고 합니다 밥과 국을 뜨던 소리들도 식어서 함께 바람소리를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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