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복(yor***) 2017-10-08 21:30:57
지금 80대인 내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쌀밥 먹기가 힘들었다.
쌀이 부족하고 비쌌기 때문이다.
언제나 잡곡을 많이 섞었으며 밀가루를 주식 대용으로 먹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군대에 가서도 쌀밥은 먹을 수가 없었다.
압맥의 비율이 쌀보다 높은 보리밥이었고 반찬은 시래기 한 조각이 떠 있는
소금된장국 한 가지였으며 어쩌다 주는 염 장아찌는 썪은 것이 많았다.
그나마도 양이 모자라 늘 배가 고팠다.
그게 유명한 자유당군대였다.
집에서도 고기는 설, 추석, 생일날에나 맛볼 수 있는 귀한반찬 이었으며
보통 때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달걀도 마찬가지로 귀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과 살벌함’ 은 전혀 없었다.
인정이 살아있었고 어른과 아이사이에 차례가 있었으며
‘사람 있고 돈’ 이라는 가치개념이 분명했다.
그만큼 사람살기에 마음편한 사회였다.
그래서 그때가 그리울 때가 많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다.
쌀밥이 버려지고 그 귀한 고기반찬도 잔반통에 버려진다.
도대체 귀한 것이 없는, 모든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분리배출을 하려고 나가보면 거기에 버려진 거의 모든 것들이
내가 어렸을 때는 주워가던 귀한 것 들이다.
차가없는 집이 없고, 평일에도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행락객으로 넘쳐난다.
며칠만 연휴가 이어져도 빚을 내서라도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나간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가난하던 시절에 비해 이렇게 풍요롭게 살고 있는데
지금 우리사회는 사람살기에 아주 불안하고 불편한 사회가 됐다는 점이다.
모두가 성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송곳 끝과 풍선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부딪치며, 부딪히고 산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는 아픈 사회가 됐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우리사회가 이렇게 살기 어려운 ‘아픈 사회’ 가 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할 수 있다.
오늘은 그중 정신분석학적 설명과 철학적인 접근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 그 대답은 이렇다.
대한민국은 7080년대를 통해 세계적 유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했다.
지구촌 사람들은 그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압축성장은 물량적 성공이기도 하고,
모두가 그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갇히게 됐다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성공 지향적이 되면 옆 사람을 살필 여유가 없어지고
모두가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가 성공, 출세하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효율적 통제를 위해 생긴 게 철저한 위계질서다.
모든 조직에서, 윗사람을 향한 분노는 철저히 억압됐고 이들을 향한
감정표현은 금기시되기도했다.
결국 그러한 생각이 공격성이 되어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아랫사람에게 향하게 되며
심지어는 자살하거나 자해, 또는 남을 학대하면서 그 분노를 풀게 된다.
위계사회, 경쟁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적 병리현상이 그것이다.
필연적으로 성공지향적인 사람은 타인들의 인정에 매 달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고 살게 된다.
그래서 남들이 바라는 대로,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좇아 ‘이게 성공이다’ 라고 쓰인
깃발을 따라 달리지만 정작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투영된 그림자를
쫓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이는 것’ 은 이룩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고 답답하다.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 지기도 했는데 뭔가 충족이 안 되고
가슴속에는 여전히 화가 남아있게 된다.
이유는 자기의 욕구, 희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더 높아지고
칭찬받고 박수 받으려고 발버둥 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서로 할퀴고 생채기내고 넘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SNS에 욕설과 험담, 남을 향한 비난이 넘쳐나고 있다.
그렇게 해야 잠시나마 스스로가 강한 존재가 됐다고 느낀다.
이 과정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공격, 피가 나고 상처나게 한다.
그것도 나쁜 의미의 보상심리다.
따라서 악풀로 공격하게 되고 그 악순환이 우리사회의
곳곳을 멍들게 하고 깨지게한다.
이 사회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단 하나,
치밀한 만큼 자기를 찾고,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이다.
그래야 남들을 통한 것이 아닌, 자기가 알아낸 자기의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같은 문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한다.
정신분석이 ‘정신병적 관찰’ 이라면
철학적 접근은 가치관에 대한 것이 된다.
우리들의 한번뿐인 귀중한 인생이 자주 꼬이는 것은
‘질투’ 와 ‘열등감’ 때문이라고한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질투가 외부를 향한 것 이라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한 것이다.
열등감을 인간행동의 중요한 설명기제로 끌어들인 사람이 ‘알프레드 아들러’ 다.
프로이드의 컴풀렉스에 반기를 들고 열등감에 집중한 인물이다.
그가 쓴 책 ‘미움 받을 용기’ 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수백만부가 팔렷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러의 열풍은 우리 모두가 그만큼
열등감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는 심리적 병으로서 자기가 남보다 뒤떨어졌거나
못났다고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심리상태다.
여기에 비해 질투는 잘 풀려나가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이기도 하다.
열등감과 질투는 필연적으로 ‘적’을 만든다.
일이 풀리는 게 아니라 더 꼬이게 된다.
그래서 극단적이 되고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아마도 거의 모두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등감과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결책이 어렵기 때문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가치관’ 의 문제가 된다.
내가 내 ‘정체성’에 충실하면 된다.
그 첫째가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나’ 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하는지를 깨달으면 된다.
그걸 천부天賦하늘이 주신 재능이라고 한다.
그게 바로 자기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省察은 스스로를 마음속으로 되돌아보고 깊이 살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몸담고 살고 있는 우리사회의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다.
그게 체면문화體面文化 다.
체면은 남 앞에서 지키려는 위신이며
체면이 서도록 일을 꾸미는 것을 체면치레라고 한다.
체면문화의 내용은,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내가, 본래의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잘못된 가치관이다.
그래서 남을 위해 내 인생을 소모하고 있다.
그걸 끊어야 한다.
그게 악이 아니라면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나대로,
내가 생긴 그대로 사는 것이다.
개성적으로 산다는 게 그런 얘기다.
특히 현대사회는 한사람, 한사람이 개성적으로 살기를 요구하는 시대다.
정말 우리 모두가 이제는 ‘남’ 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성공이다.
속이 빈 자루는 세울수가 없다. 한국격언.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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