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봄날 / 정호승
하늘에 라일락꽃이 피던 어느 봄날이었다. 시청역에서 태평로 파출소 앞을 지나 성공회 성당 뜰 앞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지날 때였다. 청바지를 입은 대학생 몇 명이 평양교회를 위한 모금함 하나를 내려놓고 기타를
치며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흰눈이 내려 쌓인 평양 봉수교회와 종탑 위로 까치집 하나 외롭게 걸려 있는 평양 장충성당 사진들을 라일락
나뭇가지 위에 걸어놓고 하나의 모금함이 되어 평양교회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조국의 길을 찾아 노래는 햇살이 되어 또 바람이 되어 길 잃은 서울의 모든 길을 떠나갔으나
그 어디에도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성공회 성당의 비둘기 몇 마리가 모이 쪼는 시늉을 하다가 후다닥 날아가고 아이들 몇 명이 모금함에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는 봄햇살이 되어 돌아갔을 뿐
아무도 그들이 만드는 조국과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해가 지고 저녁달이 뜨고 드디어 라일락 향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계속 기타를 치며 고요히
성가를 불렀으나 서울의 어둠만이 평양교회를 위한 모금함 위에 내려앉아 잠깐씩 눈물을 내비칠 뿐이었다.
서울의 별과 바람이 잠이 들고 평양의 새벽별까지 잠이 들었을 때 성공회 성당 십자가 위에 걸린 청년 예수가
살며시 내려와 천원짜리 한 장을 모금함 속에 집어넣고 다시 십자가 위에 걸리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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