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무상/무아/공/자비의 이해 / 법상스님
소유와 욕망의 무한증대를 갈구하는 탐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양분을 조장하는 분별심,
서양과 백인과 남성이 중심에 서서 지배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간중심주의의 아집 등이야말로
무명(無明)의 소산이다.
무명이란 세상의 실상과 이치인
다르마에 다한 무지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연기(緣起)이므로 무상(無常),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라는 것,
즉, 일체가 무수한 조건들에 의해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므로
영원 불변한 것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자아도 없고
고정된 실체성도 결여한 것이어서
자기만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무명에 의해 망각되는 다르마의 실상이 이와 같다면,
자연은 소유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분별과 대립이 아니라 상보와 공존의 관계이고,
시대의 기조도 자기 중심의 배타적 고수가 아니라
어떤 것도 중심임을 강변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중심이 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불교가 분별을 망상이라 하여 그토록 경계한 것은,
분별은 차별로 이어져 지배와 종속을 낳고
그런 지배를 향한 집착은
진정한 생명성을 갉아먹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김종욱, [불교생태철학] 중에서 =

소유와 욕망을 무한히 늘리려는 인간의 탐욕심과
자연과 인간을 나누고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양분의 분별심과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인간과 짐승,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 등으로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서양이, 백인이, 남성이, 인간이, 신이
그것 아닌 다른 한 쪽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런 어리석은 아집등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요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 즉 무명이란 말입니다.
무명이란 밝지 않다는 말로,
이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밝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무명에서 명으로,
즉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가려면,
다시말해 이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밝아지려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하는 답변을 이 글에서는
좀 어려운 말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거지요.
"연기(緣起)이므로 무상(無常),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라는 것"
언뜻 보면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연관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그렇기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자연이 죽으면 나도 죽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듯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기되어 있다는 겁니다.
연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말해
이 세상 모든 것도 다 끊임없이 서로 서로
인연관계에 있으면서 변화해 간다는 말입니다.
변하는 것에는 그 어떤 실체성도 없지요.
실체가 있다는 말은 고정 불변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변한다는 말이 무상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이 무아인 것입니다.
무아란 말은 다시말해
고정된 자성, 즉 자기 스스로의 변치않는 성품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무자성이라고도 말해지고
공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이라는 것이,
곧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연기이기에 공이다.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변하는 것이고(무상)
항상 변하니까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즉 내가 없고(무아)
그것은 곧 무자성이기도 하고 공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듯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모든 존재가 서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 않겠어요?
모든 존재가 모든 존재를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내 몸이 소중하듯이 상대의 몸도 소중한 것입니다.
내 몸이 곧 상대의 몸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거든요.
내가 잘났다고 내가 독자적으로 잘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데는,
부모님의 노력, 선생님의 노력, 농부의 노력,
친구들의 도움, 나아가 태양과 흙과 자연과 공기와
이 모든 우주가 그대로 나를 이렇게 나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 모든 것들이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준 부모와 같은 것들이고,
나아가 우주가 곧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비롭게 대하지 않을 수 없어요.
모두는 동체, 즉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자비를 동체대비라고 합니다.
같은 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나오는 것
그것을 큰 자비, 참된 지혜가 동반된 자비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불이(不二)법문이지요.
둘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으로 나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렇게 나누지 않으면 평화롭습니다.
차별이 없고, 비교가 없고, 싸움이 없어요.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생각도 없어지지요.
그런 지혜가 바로 무명을 없애줄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연은 욕망과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지금까지 처럼
자연을 파괴하고 마음대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가져다 쓰고자 하는
분별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하고 공존 공생하며 상호 보완해 주는,
서로가 서로를 무한히 살려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품어주고
인간이 자연을 품어주는
어머니와 아들과도 같은 따뜻한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지금같은 딱딱한 이 세상도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나누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군림하지 않으니까
배타적으로 나만 잘났고,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우리만, 내 나라만, 사람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아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저마다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분별심을 여의라고 했어요.
분별과 망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분별하지 않아야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차별이 없으면 지배와 종속이라는 어리석은 관계도 청산되는 것입니다.
차별하고 분별하면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지고,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자리잡아지기 때문에
끊임없는 욕망과 욕심 그리고 집착이 커가요.
그러면 우리의 본래 자리에 있던 생명력은
본래의 자비로 충만한 평화로움은 곧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이제
이 말을 아시겠어요?
"연기(緣起)이므로 무상(無常),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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