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단풍을 말하기 전 / 고영민

덕 산 2022. 11. 12. 15:10

 

 

 

 

 

단풍을 말하기 전

                     - 고 영 민 -​

 

단풍이 들면 마을이 더 아름다울 테니

때맞춰 찾아오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는 단풍이 언제 드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길섶이 잎들은 여전히 푸르렀으나 손으로 만져보니 말라 있었습니다

 

이 푸르나 말라 있는 잎도 단풍입니까

단풍은 어디를 거쳐 오는 물기 없고 거칠어진 손님입니까

멀리 산 밑으로 살을 다 발라내고 뼈만 남은 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문득 인간이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과 직립보행과 툭툭,

중력이 따가는 늙은 상수리나무의 잎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느린 만큼 보이는 숲과 잎들, 발자국을 따라 오는 어린 남루(襤樓)를 생각해봅니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것은 당신과 함께 그린 그림꽃 몇 점과 바람뿐입니다

 

이것도 단풍이 될 수 있습니까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춰보지 않고서는 귀와 입과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이

나는 영원히 단풍을 보지 못합니다

 

시들어야 다시 태어나고 저물어야 비로소 타오르는 날처럼

해는 저물어가고,

가을이 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늦가을 바람 앞에 서서

온통 붉은 단풍의,

당신이 사는 마을의 오랜 지명(地名)을 불러보았습니다

 

 

 

 

반응형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 2022.11.14
그 아무 것도 없는 11월 / 문태준  (0) 2022.11.13
단풍 / 강연호  (0) 2022.11.11
십일월 / 이재무 ​  (0) 2022.11.10
11월의 벼랑 / 황동규  (0) 202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