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화를 다스리는 명상법 / 법상스님

덕 산 2025. 4. 26. 06:19

 

 

 

 

 

화를 다스리는 명상법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우리의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 따라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인연이 다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한다.

 

욕을 얻어먹으면 화가 올라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 하고 괴로워할 일도 아니다.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다음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 났다',

'네가 나를 화나게 해?', '네가 나에게 욕을 해?'

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연현상인 '화'가 나의 감정,

즉 '나의 화'로 바뀌게 되면서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나를 완전히 뒤덮고 장악하며 휘감는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덧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났던 그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나고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 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無我),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 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로 착각하고 해석할 뿐이다.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문제'는 없다.

 

이처럼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요, 화를 다스리는 선(禪)적 방법이다.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