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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雪) / 김승택

덕 산 2023. 12. 16. 14:28

 

 

 

 

 

눈 (雪) / 김승택

 

이승에 착지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바로 엎드렸지.

죽을힘을 다해 나무뿌리를 움켜쥐었지.

잠시만 한눈팔면 수천 길 낭떠러지로 미끄러질 것 같아

 

지표보다 더 낮게 엎드렸지.

끊임없이 쏟아져 오더군.

내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또 다른 나의 몸들이 겹겹이 쌓이더군

숨도 쉴 수 없이 쌓이더군

 

먼저 온 자의 지혜였는지

육체노동에 익숙한 몸이라서 그런지

악착같이 버틸 수 있었지

햇살이 내리쪼이자

무동 탔던 친구들 줄줄이 흘러가더군

무장 해제하고 스스로 물이 되어 가더군.

 

보도블록 풀뿌리 밑에 납작 엎드린 내게

이승이 그렇게 좋냐고 비웃으며 떠나더군

난들 이승이 좋아 그렇게 살겠나

목숨 바칠 장미가 붉은 꽃을 피울 때까지

 

악랄하게 붙어 있다가

그때야 흘러가야지.